차를 타고 집에 가며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었습니다. 많은 것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은 저녁,하루내 많은 말을 하였으나따뜻할만하다고 할 것은 없었고나의 것이라 할만한 목소리도 없었습니다. 나는 통화를 즐기지 않고걸려온 전화를 받고 챙기는 일에도 무심하여때때로 대대적인 공분을 삽니다.전화에 대한 개념은 참 이상한 것이어서나의 소유물임에도 원할 때만 취할 수가 없지요.말하고 싶은 누군가에게 통로를 열어놓기 위해이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게 아닌가,그런 생각이 듭니다.누군가 말하고 싶은 순간과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싶은 순간이얼마만큼 일치할 수 있을까요.그런 까닭에 전화기를 싫어할 때가 많은데오늘, 라흐마니노프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이 작은 기계가 이토록 아름다운 소리로세계와 나 사이에 벽을 세워주는 것을 느꼈습니다.나의 의지로는 떨쳐지지 않던세상의 일들과 내 안의 생각들,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그저이 작은 전화기로 인함이라니.라흐마니노프를 귀기울여 듣기까지는37년이나 걸렸는데그 사이 그만큼의 시간이 없었느냐면그렇지도 않아요.그저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았고,시험에 나올 일 없었고,카세트 테이프가 우리집에 없었고,그래서 알지 못한 까닭에관심 가졌던 적이 없었고,하여 38년간수많은 라흐마니노프를 스쳐 지나보내다가어느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에몸이 우뚝 멈추었습니다.내가 넋나간 채 듣고 있던 그 선율이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다단조의 2악장이었다는 것은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지요.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,천근추를 단 것 같은 몸으로 집에 가는 길,평소 필요악으로 느껴지던 이 전화기가어느 시절에는 연주회에 가야만 들을 수 있었고극장을 나오면 사라지고 말았을 그 선율을이토록 생생하게,마치 지금 눈 앞에서 연주하듯 들을 수 있게 해줌에,하루내 막혀있던 생각들에서유체이탈하듯 나를 꺼내줌에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.필요한 것을 느끼는 속도보다개발되는 속도가 훨씬 빠른 시대.개인의 시간이 미디어에 소모되고더 많은 소모를 만들기 위한 많은 것들이끝없이 쏟아지고 있지만그 가운데 잘 누릴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,적어도 차에서 혼자라흐마니노프를 들을 수 있고출근길에 존 메이어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을잘 누릴 수 있다면,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각자의 복이 아닐까,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.산에 숨겨놓은 보물찾기 종이를 찾아내듯,수많은 풀들 사이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하듯.나의 속도대로 걷게 할 커다란 비누방울막을 제대로 만들면 쉴새 없이 다가오는 소리 가운데에서정적을 찾아내고그 순간을 나의 목소리로 채울수도 있겠지요. 그 때는 부디오늘의 내 목소리보다 따뜻하고,나의 것이라 해도 좋을밀도를 가지고 있기를 바랍니다.감사합니다 라흐마니노프.